[리사운드교회] 나는 꼴머슴입니까.
얼마 전에 <기독일보>에 소개된 <머슴 바울>이라는 뮤직다큐멘터리 영화의 예고편을 보았습니다.
예고편이어서 전체 줄거리를 알 수는 없었지만, 머슴이라는 단어가 뇌리에 남았습니다.
감리교 최초의 한인 목사인 김창식 목사님에 관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그래서 옛적에 실제로 있었던 머슴의 종류늘 찾아보았습니다.
꼴이나 공급하는 꼴머슴,
한 달을 정하여하는 달 머슴,
힘든 일까지도 알아서 잘하는 상머슴, 혹은 실 머슴,
장난이 심한 선머슴,
참으로 다양하였습니다.
<머슴 바울>에 소개되는 김창식 목사님은,
선교사들이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흉흉한 소문의 진상을 밝히려 선교사의 집에서 머슴살이하다가 선교사로부터 전도 받아 1901년 한국 감리교 최초의 <집사 목사>로, 그리고 1908년 <장로 목사>로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는 늘 머슴이었던 자신을 잊지 않고 교만에 빠지지 않으려 유의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날도 한국 교회의 큰 머슴 중 한 분으로 기억된다고 한국 감리교 교회사에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농촌에도 머슴제도는 사라졌습니다만 옛적에는 활성화되었던 제도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집사님 한 분도 옛날 경북 예천에 사실 때에 두 명의 머슴을 두었다고 하십니다.
머슴이였던 자가 목사가 되어서 머슴 같은 목사여야 한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 말씀입니다.
“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 한 절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까닭과 섬김의 결국까지도 설명해 주십니다.
제가 옛적에 교회에서 중등부 반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어린 학생들에게 성기는 예수님에 관하여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학생들에게 예수님은 숭배의 대상이지 부림의 대상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자에게는 부리는 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부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섬김과 육적인 섬김은 외양은 같을 수 있어도 내면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늘 섬김은 누가 개인적 의지늘 가지고 섬기는 것과는 다른 것일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 된 성김일 것입니다.
누가 높고, 누가 낮아서 섬김이 아니라 하나됨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섬김이 주늘 본받는 섬김이 되려면 먼저 주님과 하나 됨이 필요한 것이라 결론지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전인격이 바탕 됨 없는 섬김이라면 그것은 사역, 즉 삯을 위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 사역의 근거는 돈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사하는 사람의 목적이 돈을 버는 것인 것처럼 역시 사역의 목적이 돈과 명예에 대한 집착 일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전에 한국에서는 <종님>이라는 단어가 회자하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목회자를 종이라 부르기는 어렵고 그래서 좋은 의미라 불렀던 것 같은데 참으로 이상한 단어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구태여 이상한 단어늘 연상케 하는 사실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분명히 머슴이 되겠다고 하는데 너무 높은 곳에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까지 오셨는데 그의 종된 자들은 위로 올라가려 함이 너무나 뚜렷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종됨을 자처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겸손, 겸손, 겸손한 참모습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 자신이 먼저 참 머슴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음입니다.
평신도, 특 신도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노예도 주인도 같은 신분일 수밖에 없었음이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구별하지 아니하시는데, 그의 피조물인 우리끼리의 구별함이 필요 없음은 자명한 일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별함에 앞서 하나 됨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나 됨이 선재 할 때 직분은 맡은 일의 구분이 될 뿐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질서는 필요하지만, 그것이 높고 낮음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온전해질 때 우리는 이 땅에서도 천상을 맛볼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천상에서의 섬긴 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과연 천상에서 섬김이라는 단어가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천상의 섬김은 그저 함께함이라 여겨집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이 섬김의 기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도 온 맘 다해 이웃을 섬기는 상머슴의 날 되길 기원합니다.